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8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= 출마 후보 관련 === * 사상 최초로 남성 후보(3명)보다 여성 후보(4명)가 더 많은 대선이었다.[* 남성 후보는 [[문재인]]([[민주통합당]]), [[박종선]]([[무소속]]), [[강지원]](무소속)으로 3명이었으며, 여성 후보는 [[박근혜]]([[새누리당]]), [[이정희]]([[통합진보당]]), [[김소연(1970)|김소연]](무소속), [[김순자]](무소속)로 4명이었다.][* 완주한 후보만 보면 남성 후보와 여성 후보의 수가 3명으로 동일하다.] * '''단 2명의 후보에게 극단적으로 표가 쏠린 드문 대선이다'''.[*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중도 사퇴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당 후보는 양강이었던 박근혜와 문재인 둘뿐이었다.][* 16대 대선도 노무현과 이회창의 양강 구도였지만 민주노동당의 [[권영길]]이 3.89%, 95만표를 받아가며 선전했다. 그러나 18대 대선은 [[군소후보]]들이 3%는커녕 0.5%도 넘기지 못했다.]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의 득표율을 합치면 무려 '''99.57%'''이다. 반대로 말하면 나머지 후보들의 총 득표율이 불과 0.43%밖에 되지 않았다.[* 극단적인 양당제 국가로 알려진 [[미국]]에서도 이 정도로 유력후보 2명에게 표가 몰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.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사표방지심리가 [[대한민국]]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. 2000년 이후 [[미국 대통령 선거]]에서 양당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2000년 96.25%, 2004년 99.10%, 2008년 98.58%, 2012년 98.26%, 2016년 94.27%로 모두 한국의 18대 대선보다 낮다.] 이렇게 된 이유는 군소후보 4명 중 [[강지원]] 외엔 기존에 잘 알려진 인물이 없었던 데다가 두 후보간의 양자 구도가 [[결선투표]]급으로 매우 막강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. * 특이하게도 남성 후보들은 모두 짝수 기호를, 여성 후보들은 모두 홀수 기호를 받았다. * [[무소속]] 후보가 정당 소속 후보보다 더 많았다. 정당 소속 3명, 무소속 4명[* 다만 무소속으로 나온 김소연 후보와 김순자 후보의 경우 당시 문재인 중심의 야권 단일화에 반발한 일부 재야세력이 진보신당 내 현장파를 중심으로 '변혁모임'을 만들어서 김소연을 후보로 냈는데 진보신당도 공식적으로 김소연을 지지하였다. 이때 진보신당 내 일부 사회당계는 이에 반발하여 19대 총선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였던 김순자를 지지하였다. 물론 상기했듯 이들의 절대 득표율은 낮아서 도토리 키재기이긴 하였지만, 그래도 김순자가 김소연보다 표를 훨씬 더 받은 건 함정.]. * 엄격한 의미로 따지자면 헌정 이후 대선들 중 최초의(?) 여야대결이었다. 이외의 대선들은 대통령의 탈당/파면으로 법적으로는 모두가 야당인 상태에서 치러졌는데, 이 대선 때는 대통령 이명박이 탈당을 하지 않았기에 엄격한 의미로는 첫 여야대결이었던 것. 그런데 사실 그 [[이명박]]조차 탈당만 하지 않았을 뿐 당시 정권 심판론 속에 여당인 새누리당은 사실상 여당내 야당 컨셉을 유지하던 정치인 박근혜 체제로 뭉치고 MB는 거의 없는 대통령 취급을 했기 때문에 묘하긴 하다. --말년에 인기 있는 대통령 좀 보고 싶다.[* 이 선거에서 낙선한 문재인 후보가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 임기말까지 50%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유지하며 나름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마치기는 했다. 다만 5년만에 정권교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다소 빛이 바랬다.]-- * 제6공화국 대선 중 원외정당 후보가 없는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대선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